27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온라인의 한 공간에 모여 연대하는 그룹이 있습니다. 각자 본업이 있는 분들이 자기 귀한 시간 귀한 노력을 들여 단체로 이게 다 웬 고생일까요...
삶이 고통이라는 것은 옛날 어른들이 늘 하던 말씀이었습니다. 첨단의 IT의 인공지능에 블록체인에 뭐뭐 막 난리가 난다고 하는데, 세상이 점점 좋아진다는 것은 잘 알겠으나 그것은 잘난 남들이 뉴스에 나와서 그렇다는 것이고, 우리네 각자의 삶은 하나하나가 여전히 고통의 연속입니다. 고통은 싫지요. 안 고통스러우면 좋겠고요. 편하고 행복하게 살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듣기로는 고통이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아픔이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고심해봅니다......
흙바닥에 처박혀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누가 뭐랄것 없이 많지요. 한민족 (韓民族)이 한민족 (恨民族)이라고 하지 않나요. 우리네 역사가 온통 한 (恨)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잘 뭉치는 사람들이 또 없습니다. 한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아픔을 같이 겪을 때에 우리는 어떤 진실을 보게 됩니다.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는 상태, 곧 입장의 동일함입니다. 다른 사람과 내가 하나됩니다. 연대 (連帶) 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아래는 제가 예전에 썼던 글을 인용해봅니다.
나의 아픔은 곧 남의 아픔인 경우가 많고
나의 소망은 곧 남의 소망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갖는 것은 혼자 갖는 것이라 입장이 같을 수 없으나, 잃는 것은 나만 잃는게 아니라 입장이 같을 수가 있습니다. 잃음, 비움, 버림, 상실로부터 우리는 입장의 동일함을 겪습니다. 얻음, 채움, 움켜쥠으로부터 우리는 입장의 분리를 겪습니다. 아래에 고 (故) 신영복 선생님의 한말씀을 인용해봅니다.
시대와 사회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처한 위치가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은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의 출발은 대상과 내가 이미 맺고 있는 관계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검은 피부에 대한 말콤X의 관계, 알제리에 대한 프란츠 파농의 관계….
( … )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가운데)
입장의 동일함이 관계의 최고 형태라 합니다. 이 문장에서 하나가 된다는 뉘앙스를 주목합니다. 입장이 동일하다는 말은, 나와 네가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픔을 다소 공유한다 해도, 여전히 나와 너는 다른 사람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입장이 동일하다는 말은, 내가 서 있는 자리와 네가 서 있는 자리가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서 있는 자리, 곧 공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 있는 자리가 같을 때에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무대라는 말이지요.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거나 공연을 하면, 그곳에는 너도 없고 나도 없습니다. 단 하나의 공간만이 있지요. 그럴 때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됩니다. 객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공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배우는 무대 위에서 자기를 버리고 바로 그 공간으로 녹아들어갑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고통이랑 입장의 동일함이랑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고통.. 고통이란 무엇일까요.
삶이 고통 가운데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고통은 문제로부터 옵니다.
참된 것, 진실한 것은
문제가 해소되었을 때에 옵니다.
문제란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봅니다.
문제란 무엇입니까.
1이어야 하는데 현재는 0이다.
0을 바꿔서 1로 만들고 싶다.
돈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는 돈이 없다.
돈없는 상태를 바꿔서 돈있는 상태로 만들고 싶다.
그것이 문제 입니다.
0과 1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서로 구분된 두 상태 이지요.
이 둘을 같게 만들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애를 쓰게 됩니다.
그러면 고통이 찾아오지요.
돈이 없으면 돈을 갖고 싶고
돈이 있으면 돈을 더 갖고 싶고
돈을 잃으면 돈을 메꾸고 싶고
그러니 고통이 옵니다.
고통이란, 스스로 분리된 두 상태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분리된 상태란,
비유를 들자면,
컴퓨터에 전기가 들어간 상태와 유사합니다.
전기가 들어갔으므로 회로는 0 아니면 1의 상태를 반드시 가지게 됩니다.
0은 0의 의미가 있고,
1은 1의 의미가 있지요.
둘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입장이 달라진 것입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유 (有) 라는 것입니다.
하나된 상태란,
비유를 들자면,
컴퓨터에 전기가 들어가지 않은 상태와 유사합니다.
전기가 들어가면 회로는 0 아니면 1의 상태를 갖는데
전기가 들어가지 않았다면 0이나 1이라는 개념이
아무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하는 개념을 놓아버린
무 (無) 라는 것이지요.
고통 속에서 삶의 진실을 본다는 것은
그래서
0과 1을 무 (無) 의 상태로, 놓아준다는 뜻입니다.
움켜쥔 손을 펼쳐서 보내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흐름 속에서 다시 새로운 0과 1이 나옵니다.
무 (無) 에서 유 (有)가 나오는 것이고
유 (有)는 곧 무 (無) 로 돌아갑니다.
죽음을 대면해야 삶이 보인다는 말,
죽음과 부활을 상징으로 읽으면 그렇게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움켜쥐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또 움켜쥐면
그다음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게 고통의 고리가 만들어지고
힘껏 괴로워하다가
어느 때에 톡 하고 놓아주면
문제는 해소됩니다.
0을 1로 바꾸거나 1을 0으로 바꾼다고 해서 문제가 해소되지 않습니다.
0을 1로 바꾸게 된다면, 그래서 문제를 해결한다면, 금새 또 다른 0이 나타나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러면 평생 문제가 끊이지 않고 발생합니다.
해결하고 또 해결하기의 연속입니다.
이번 움켜쥠에서 다음 움켜쥠으로 옮겨가기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움켜쥐는 한은 문제를 해소할 수가 없습니다.
해결 (解決) 이 있고
해소 (解消) 가 있습니다.
해결은 결단 혹은 결정하여 푼다는 뜻이고
해소는 소멸시켜 푼다는 뜻입니다.
해결은 유 (有)를 또다른 유 (有) 로 바꾸는 것입니다.
해소는 유 (有)를 무 (無) 로 놓아주는 것입니다.
둘은 다른 개념입니다.
문제는 문제를 풀어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를 움켜쥔 손을 놓아줌으로 해소하는 수가 있습니다.
놓아준다는 것은
유 (有) 이던 것을 무 (無) 로 돌려보낸다는 뜻입니다.
유 (有) 이던 것을 또 다른 유 (有) 로 바꾸겠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해소하는 것입니다.
손에 꽉 쥐고 있는 0과 1의 전선을 뽑고, 그만 가라고 놓아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합니다.
사람은 태어났다가 죽고
돈은 있다가 없다가 있다가 없고
부모님도 친구들도 다들 있다가 언젠가는 먼지가 되어 사라집니다.
있을 때는 잘 어울리고 놀다가
없을 때가 오게 되면, 그런 때가 온다면
놓아주는 것입니다.
다 필요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돈은 중요하지요. 열심히 일도 해야 하고요.
그런데 만약에 인생의 어느 때에 그 돈을 놓아줘야 할 때를 만나면
그만 움켜쥐고서 이제 가라고 놓아주는 것입니다.
돈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만나면 또 받아주고
돈이 나를 떠날 때가 온다면 또 그저 놓아주는 겁니다.
사람도 필요합니다. 열심히 만나고 소통하고 친해지고 하지요.
그런데 만약에 인생의 어느 때에 그 사람을 놓아줘야 할 때를 만나면
그만 움켜쥐고 이제 가라고 놓아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만나면 또 받아주고
사람이 나를 떠날 때가 온다면 또 그저 놓아주는 겁니다.
떠난 사람을 붙들면 문제가 됩니다.
오는 사람을 밀어버리면 그것도 문제가 됩니다.
떠난 돈을 붙들면 그것도 문제가 되고
오는 돈을 밀어버리면 그것도 문제가 됩니다.
올 때에는 그저 오는대로
갈 때에는 그저 가는대로
순리 입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 있을 때에 삶을 돌이켜 보게 됩니다.
내가 그것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고통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가만히 톡 놓아주도록
우리를 자극하는 것이
고통입니다.
미래를 움켜쥐고, 과거를 움켜쥐고, 그러면 현실과 괴리된 문제 가운데 고통을 겪고
그로부터 우리는 해결과 해결과 해결과 해결의 고리에서 헤메다가
더이상 해결이 아니라
해소하는 길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유 (有)이던 문제가
무 (無)로 돌아갑니다.
고통이란 피하고 싶은 것이라
쓸모없다고 하실지 모르나
그것이 고통의 역할입니다.
그만 가라고, 움켜쥔 손을 놓도록
우리를 자극하기 때문이지요.
쓸모없음의 쓸모있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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