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는 별 일이 없다면 이쪽과 저쪽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으려 합니다. 어른의 특징이란 모아놓으면 싸우는 것이니까요. 싸움이 필요할 때는 또 해야 하는 것이 어른의 사정이지만, 그러다가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싸움판을 두 눈 뜨고 지켜보는 아이들입니다.
집에서 부모님이 부부싸움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나요? 서로 좋아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한번 싸우기 시작하니 잡아죽일것처럼 물어뜯지 않던가요? 모든 가정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많은 가정이 그렇답니다. 그럴 때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멋모르는 아이들이지요. 어른끼리의 어떤 분쟁에서든 아이들은 죄가 없다는 말에는 반론을 두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그 정의상 사리분별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싸움이란 사리분별이 되는 사람이 하는 일이거든요.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 라는 구분에서 싸움이 옵니다. 아이들은 그런 구분에 능숙하지 않으므로, 당장 싸우는 것 같다가도 금방 언제 그랬냐는듯 천진하게 됩니다. 어른들은 사리를 한 번 구분하면 그것을 놓아주지 못하고 영원히 움켜잡습니다. 그것을 아이들이 보고 따라하지요.
어른은 어른대로 살라고 놔 두고, 이제부터는 꾸러기 여러분에게 드리는 글로 주욱 연재를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어린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뭔가를 가르쳐줄 수 있는 어른들이 주변에 없다면 스스로 배워서 깨우쳐야 합니다. 현실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읊어봅니다. 아래 인용구에서 말하는 바는, 교육이란 관찰자(=학습자)를 배제하고 정의될 수 없다는 개념입니다. 학교에서 또 학원에서는 학생이 누구인지 알기도 전부터 커리큘럼을 전부 정해놓습니다. 그것부터 잘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학생이 배제된 채로 커리큘럼을 만드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기능은 반복훈련에 의해 습득하고 향상시킬 수 있다. (…) 그러나 기능을 탐구적이고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교육은 반복훈련에 의존할 수 없다. 교육이 가르침의 결과일 수 있지만 그런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반복훈련에 반대되는 것이다. 공동체에는 그 공동체가 축적해온 기억이 있는데, 그 기억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이미 가지고 있는 당사자 사이의 관계에 교육은 의존한다. (…) 그들은 그들 자신이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정의한 문제를 둘러싸고 모일 수 있어야 한다. 창조적이고 탐구적인 공부를 위해서는 같은 말이나 문제에 대해 동시에 고민하는 동료들이 필요하다.
- 학교 없는 사회 p.51
[책] 학교 없는 사회_이반 일리히
이 책의 의미 - 나는 종종 평생학습관을 간다.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나에게 '즐거움'과 '자극'이 된다. 지난 겨울 어느 날, 나는 하루 종일 머물 예정으로 마포구 평생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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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학교에서 익숙하게 겪어왔듯, 학습자료를 만드는 사람과 학습자료를 읽게 될 사람이 기능적으로 분리된 상황에 늘 마주합니다. 전문화라고 합니다. 가르치는 전문 (=선생)과 배우는 전문 (=학생)입니다. 기능 단위로 역할을 구분합니다. 책에서는 전문화가 심화된 세상이 자꾸만 문제를 일으킨다고 말합니다. 앗, 전문가란 좋은거 아닌가요? 다들 전문가가 되지 못해서 안달을 하는데요. 네, 전문화된 사회는 좋은 점이 많지요. 아프면 의사를 찾고 배고프면 식당을 찾습니다. 옷을 원하면 옷가게를 가고, 돈을 뽑으려면 은행에 갑니다. 각 분야가 기능별로 전문화된 덕분에 개개인은 많은 서비스를 편리하게 골라서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밥 할 줄 아시나요? 웃을 수선하거나 자기 손으로 지어입을 줄 아시나요? 자산관리를 스스로 할 줄 아시나요? 어지간하면 전부 어딘가에 맡겨서 처리합니다. 돈을 주고 구입해서 사용합니다. 전문화된 사회에서는 이렇게 모든 것을 검색할 줄 알지만 어떤 것도 생산할 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가 됩니다. 저도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육도 다르지 않아서, 학교에 가면 사람이 바보가 된답니다. 스스로 해야 할 일을 교육 전문가라는 사람에게 자꾸 위탁하기 때문이에요.
나는 현대성에 들어 있는 부정적 속성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시간을 잡아먹는 초고속 교통, 병을 만드는 의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교육이 그것이다. 허울뿐인 혜택이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부정적 외부효과가 불평등하게 부과되는 것은 이 부정적 속성에 뒤따르는 결과이다. 나의 관심사는 현대화된 가난이 인간에게 끼치는 직접적이며 구체적인 결과이며, 그것을 견뎌내는 인간의 인내이며, 이 새로운 비참함에서 벗어날 가능성이다.
-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p.13
현대인은 어디서나 감옥에 갇힌 수인이다. 시간을 빼앗는 자동차에 갇히고, 학생을 바보로 만드는 학교에 잡혀 있고, 병을 만드는 병원에 수용되어 있다. 사람은 기업과 전문가가 만든 상품에 어느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자기 안에 있던 잠재력이 파괴된다.
-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p.85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이반 일리치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는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이 시스템과 전문가들에 대한 신랄한 반론이며, 인간이 지닌 자발적 행동 능력에 대한 강력한 변론이다.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사상가’로서 여러 학문을 넘나들며 현대의 상식과 진보에 근원적 도전을 던진 이반 일리치. 이 짧고 강력한 에세이는 그의 저서 중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현실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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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월급을 받으면서 회사의 부품으로 오래도록 살다 보면 나중에 나이들어 퇴사를 했을 때 스스로 할 줄 아는게 없음을 깨닫고 좌절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일이란 기획->제안->설득->협상->계약->생산->유통->운영->잔금처리까지 한 사이클이 온전하게 있어야 하나의 일 이기 때문입니다. 이중에 단 하나의 분야만 할 줄 안다면 혼자서는 아무 일도 못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온전하지 않은 것이지요. 온전함은 어떤 단위 이하로 뺄 것이 없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온전한 상태에서 뭔가를 빼면 온전하지 않게 되어버립니다. 일도 그렇고 공부도 그렇습니다. 스스로 공부하는 온전한 사이클에서 몇몇 기능을 학원에 맡겨버리면 결국 혼자서는 온전한 공부를 할 줄 모르게 되어버립니다. 전문화의 폐해입니다.
완전함, 온전함
채울 것인가 덜어낼 것인가 | 나이가 들면서 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왜 사는가 하는 물음을 가져본 적이 있다. 진학이나 취업, 이직 때마다 나에게 맞는 길인가를 알아야 결정을 하는데 내가 나를 모르니 결정할 수 없다. 자기를 알아가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오해하지 말자. 아는 방법이 아니다. 알아가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보자. 아래 그림의 왼쪽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아 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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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든 어른이든 그 하는 일에는 무겁고 가벼움은 있되 네 역할 내 역할의 구분은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아이들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작은 심부름을 도우면서 자랐습니다. 아주 어릴때는 그릇을 옮기거나 물을 떠다 주는 등의 심부름을 거들고, 나이가 좀 더 들면 소를 키우고, 나이가 더 들면 장작을 패고, 그런 식이었지요. 일의 가벼움과 무거움은 있었으나 일의 기능에 따라 구분을 두지는 않았습니다. 학교 교육이 망가진 이유를 저는 여기에서 봅니다. 교사는 생산하고 학생은 소비합니다. 한 쪽은 일방적으로 생산하고, 한 쪽은 일방적으로 소비합니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역할 구분이 명확합니다. 본래 한 몸이어야 할 기능 단위가 둘로 쪼개어져 불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교육, 훈련
겸손과 유능 | 아이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학원을 보내야 하나 홈스쿨링을 해야 하나. 요새는 학교만 다닌다고 되는게 아닌데,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 교육 (敎育)은 가르치고 (敎) 기른다는 (育) 뜻이다. 교육 (education)에는 끄집어내다, 꺼낸다는 뜻이 있다 (bring out, to lead).
집에서도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만 해야 하는 기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공부하는것이 아이들의 역할 (role)입니다. 사람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다른 기능은 모조리 거세된 채로 자라납니다. 아이들은 밥도 할 줄 모르고 설거지도 할 줄 몰라요. 그건 어른들의 역할이거든요. 여러분, 이런 식으로 기능단위의 구분을 하는데서 사람의 온전함이 깨어집니다. 온전함이 깨어지면 어떻게 되나요? 무능해집니다. 눈에 생기가 없어지고 세상 허무함과 무기력에 빠집니다. 스스로도 본인이 무능력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학교를 10년 20년을 다녀도 할 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는 거에요. 마치 직장에서 한 가지 역할만 30년을 한 뒤에 퇴직해서 자괴감에 빠지는 어른들 처럼요. 월급쟁이 어른들처럼 아이들도 같은 무기력에 빠져 살아갑니다. 가만 놓아두었으면 차라리 온전했을 사람이, 기능 단위로 전문화된 사회에서는 불구가 되어 버립니다. 꼭 교육에 국한하지 않아도 이 사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시선의 높이
붕괴된 교육이 의미하는 바 | 한국 교육이 실패했다는 것에는 반론을 제기하기가 더 어려울 지경으로 한국 교육은 실패했다. 그 원인은 매우 복합적이라 일일이 거론하기 어렵지만, 이번 글에서는 그 중 하나를 짚어보자. 아래 그림의 왼쪽과 오른쪽을 대비해 본다. 선생과 제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선생과 제자의 관계에도 매우 여러 형태가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두 장면을 그려보았다.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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