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인대전 시즌1 넷드링커와 교수

계란 후라이론

여러분께 말씀을 하나 드려봅니다...
왜냐면 이 블로그는 저의 개인 블로그이며
심란함을 썰푸는 용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심란하면 썰을 푸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블로그 이름도 썰팔이입니다.

계란후라이를 하나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계란후라이는
닭이 낳아서->팔려서->구매해서->냉장고에 있다가->식용유에 소금에 기타등등 구워서 냠냠 먹습니다.
접시에 올려진 계란후라이만을 보자면 그 맛에 따라서
'좋은 계란후라이' 혹은 '나쁜 계란후라이' 라고 단정지을 수가 있게 됩니다.

단정짓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전의 문맥에 내가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차려줘서 완전조리된 후라이만 얌전히 먹고 자란 사람은 
그래서 후라이를 오로지 '좋은 계란후라이' 혹은 '나쁜 계란후라이' 로만 구분하게 됩니다.
객체화 입니다. 후라이를 먹으면서도 후라이를 둘러싼 문맥이라는 개념이 나에게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오로지 좋거나 나쁜 것으로만 후라이를 구분합니다.

이분법 (dichotomy)이란,
그래서 가장 편리한 수단이기는 하나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으로는 가장 그릇된 것입니다.
결정지은 후에 관찰하기 때문입니다.
결정지은 후에 관찰을 하면 어떻게 되나요?
반쪽만 관찰하게 됩니다. 다른쪽 세상은 아예 인지조차 하지 못합니다.
거기서 극심한 왜곡이 발생합니다.

좋다/나쁘다를 칼같이 가르는 건 후라이를 먹는 소비자의 시선입니다. 이전의 맥락을 알지 못합니다.
좋다/나쁘다를 칼같이 가를 수 없다는 건 후라이를 만드는 생산자의 시선입니다. 이전의 맥락을 알고 있습니다.

계란후라이는 실제로는 어떠한가요.
계란후라이가 지금 맛있는 이유는, 그 이전의 이루 말할 수 없이 연결된 모든 문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란후라이가 지금 맛없는 이유도, 그 이전의 이루 말할 수 없이 연결된 모든 문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맥이 흐르는 중이라면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결과를 내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처음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그냥 흐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입에 넣고 씹는 그 순간의 계란후라이는
맛있고/맛없고 로 양분하여 단정지어 결과내고 끝! 지워버리는 객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계란후라이는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은 것입니다. 처음도 끝도 없이 흐르는 그 무엇입니다.
모든 것은 그렇게 연결되고 또 흐릅니다.
물만 흐르는게 아니라 후라이도 흐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라는 개념은 세상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후라이의 비유 입니다.
사람을 좋다/나쁘다고 칼같이 가르는 건 관객의 시선입니다. 이전의 맥락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을 좋다/나쁘다고 칼같이 가를 수 없다는 건 배우의 시선입니다. 이전의 맥락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도 후라이와 같아서, 흐르는 것입니다.
물이란 그 흐름을 막으면 고이고, 고이면 썩게 됩니다.
저 (홍원의)라는 사람은, 사람 하나를 세는 기본 단위로 보통은 인식이 됩니다.
좋은일이 일어나면 '쟤'한테 좋은일이네 라고 부르고
나쁜일이 일어나면 '쟤'한테 나쁜일이네 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람은 객체로 재는 단위가 아닙니다.
후라이나 물과 같이, 사람도 흐르고 변하는 그 무엇이에요.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그것은 결과이고, 결과는 구분함이며, 이분법 (=둘로 구분함)은 곧 관객의 시선입니다. 배우의 시선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인생의 배우입니다. 관객이 어디 있나요?
결과를 내지 마세요. 결과를 낸다는 건 구분한다는 뜻입니다. 흐름을 막겠다는 다짐입니다.

개싸움판에서 누구 하나를 공중에 매달아 좋은사람 / 나쁜사람을 구분해 손가락질하는 일은
후라이가 실은 닭에서 온건지 소에서 온건지도 모르고서 후라이 맛을 평가하는 것과 같은 행동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전 문맥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차단한것입니다. 구분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물을 제대로 이해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원래 흐름이 마땅한 그것을 차단했기 때문입니다.
결과를 한번 내어버리면, 그 즉시 이해함에 왜곡이 발생합니다. 세상에 결과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사회는
서로에 대하여 하는 말의 통로, 감정의 통로가 열려있어야 합니다. 사람 사회도 흐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를 비판하면 그렇구나 흘려버리고
누가 나를 비난하면 그렇구나 흘려버리고
누가 나를 칭찬하면 그렇구나 흘려버리고
누가 나를 추켜세워도 그렇구나 흘려버리는
그런 것입니다. 사람이란 후라이와 같아서, 흐르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뭔가를 움켜쥐면
움켜쥔 것과 아닌 것이 뚜렷이 구분됩니다. 
비판을 그 마음에 움켜쥐든
비난을 그 마음에 움켜쥐든
칭찬을 그 마음에 움켜쥐든
추켜올림을 그 마음에 움켜쥐든 간에
움켜쥔다면 그즉시 썩게 됩니다. 쥔 쪽과 안쥔쪽이 뚜렷이 구분됩니다.
움켜쥠으로 흐름을 막았다는 말이 됩니다. 구분된 것은 썩게 마련입니다.

대화의 채널을 차단한다는 행위는 무엇입니까.
스스로 썩겠다는 다짐입니다.
내 쪽과 네 쪽이 흐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과 아주 똑같은 식으로
온라인에서 누구 하나를 좋은놈/나쁜놈으로 편을 가르면 어떻습니까.
좋은놈편 나쁜놈편이 뚜렷이 구분되어 서로 흐르지를 못합니다.
스스로 썩겠다는 모두의 합창입니다.

나와 너의 대화채널을 차단하는 행위
좋은놈 나쁜놈을 구분하는 행위는 
아주 똑같은 것입니다.

흐름을 막으면 이 편과 저 편이 갈라지고, 그러면 둘 다 썩게 됩니다.
아무도 득보지 못하는 판이 됩니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는 판이 만들어집니다.
배우는 없고 관객만 가득한 극장이라는 뜻입니다.
모두가 결과만 내놓기 때문입니다.
지금 수천명의 방문자께서 두 눈 뜨고 목도하시는 이 개싸움판이
바로 그런 판입니다. 여기에는 패자만 있습니다.
흐름이 없이 오로지 구분만이 존재합니다.
그러면 바로 이러한 개싸움판이 탄생합니다.

그것이 바로 저 구분함에서 옵니다.
왜일까요? 내가 맥락에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팔짱낀 관객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움켜쥔 것을 (=구분한 것을) 놓아서 흘려보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우가 무대 뒤에서 땀을 쏟거나 말거나 관객은 그에 무심합니다.
나는 관객이고 돈 냈으니 재밌게 춤추는 것만 보겠다는 겁니다.
그러한 구분함은 곧 스스로를 썩게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이 블로그의 목적은
사람 하나 잡아서 내리꽂는 블로그가 아니라고 누누히 말씀드렸습니다. 
증오로 문제를 해결하지 마세요. 증오는 이분법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것입니다.
구분함의 상한 (上限)이 곧 증오입니다.
내가 기어이 썩어문드러지고야 말겠다는 가장 극한의 다짐입니다.

사람 사회의 어떤 문제도 증오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증오를 움켜쥐다니요. 
구분이 더욱 심해지고, 문제는 갈수록 해결되지 않으며,
이 판에 얽혀든 모두가 더욱 많은 피를 쏟게 됩니다.
피를 쏟은 대가로는 더더더욱 많은 피를 쏟게 됩니다.
모두가 다함께 나락으로 직행하는 길입니다.
어째서 이 현대사회 인터넷 좋은세상에 태어나서 굳이 나락으로 가야 합니까.

물이 고이면 생기는 일입니다.
사람은 물이고, 물은 흘러야 합니다. 
구분하지 마세요. 움켜쥐지 마세요. 흐르게 해주세요. 부탁입니다.